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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관한 사람에게는 괴이한 것이 없으나, 속인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으면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달관한 사람이라 해서 사물들을 일일이 찾아 눈으로 직접 보았겠는가.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눈앞에 그려 보고, 열가지를 보면 백가지를 마음속으로 상상해 보았을 뿐이다. 천만 가지 괴기한 현상이란 도리어 사물에 잠시 붙은 것이고, 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한가롭게 여유가 있으며, 사물에 응수함이 무궁무진하다.

반면 본 것이 적은 자는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가 검다고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두루미가 다리가 길다고 위태롭게 여긴다. 그 사물 자체는 본디 괴이할 것이 없는데 저 혼자 화를 내고, 한 가지 일이라도 제 생각과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조리 모함하려 든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색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石綠색을 발하기도 한다. 해가 비치면 자주색이 튀어 올라, 눈에 어른거리다가 비취색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그 색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도 않고서 먼저 마음속으로 정해 버린 것이다.

아! 까마귀를 검은색에 가두어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다시 까마귀를 기준으로 이 세상의 모든 색을 가두어 두려는 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앞서 말한 푸른색과 붉은색이 까마귀의 검은색 중에 들어 있는 빛인 줄 누가 또 알겠는가. 검은색을 일러 ‘어둡다’고 하는 것은 비단 까마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색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은 검기 때문에 사물을 비출 수가 있고, 옻칠도 검기 때문에 거울처럼 비추어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색이 있는 것 치고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형체가 있는 것치고 맵시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미인을 살펴보면 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고개를 나직이 숙이고 있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턱을 고이고 있는 것은 한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것은 시름에 잠겨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무언가 기다리는 것이 있으면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이고,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만약 또 그녀에게 재계齋戒하듯이 단정히 서 있지 않는다거나, 소상塑像처럼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지 않는다고 나무란다면, 이는 양 귀비楊貴妃더러 치통을 앓는다고 꾸짖거나 번희樊嬉더러 쪽을 감싸 쥐지 말라고 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사뿐대는 걸음걸이(蓮步)를 요염하다고 조롱하거나, 손바닥춤(掌舞)을 경쾌하다고 꾸짖는 격이다.

나의 조카 종선宗善은 자가 계지繼之인데, 시를 잘 지었다. 한 가지 법에 얽매이지 않고 온갖 형식을 두루 갖추어, 우뚝이 우리나라의 대가가 되었다. 성당盛唐의 시풍인가 하면, 어느새 한나라, 위나라 때의 시풍이 되고, 또 어느새 송나라, 명나라 때의 시풍이 된다. 그래서 ‘송나라, 명나라 때의 시풍이로군’하고 말하기가 무섭게, 다시 성당의 시풍을 띠고 있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두루미를 위태롭게 여기는 것이 너무도 심하건만, 계지의 정원에 있는 까마귀는 홀연 푸르렀다 홀연 붉었다 한다. 세상 사람들은 미인을 재계하듯이 서 있거나 소상처럼 앉아있게 만들려고 하지만, 손바닥 춤이나 사뿐대는 걸음걸이는 날이 갈수록 경쾌하고 요염해진다. 쪽을 감싸 쥐거나 치통을 앓는 모습도 각기 맵시를 갖추고 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에는 달관한 사람은 적고 속인들만 많으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



연암노인
燕巖老人이 연상각烟湘閣에서 쓰다.

(菱洋詩集序)





세상이 무섭다는 걸 깨달은 사람은 매사에 조심하지. 조심성은 대개 인격을 떨어뜨리게 되네. 세상의 다른 조심스런 사람을 보게. 세상을 뚫고 나가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세. 친구로 삼겠는가? 큰일을 맡기겠는가? 이해관계 이상의 무엇을 바라겠는가?
세상을 무서워해선 안 되네. 태어난 세상이 무서워서야 살아있는 것 자체가 괴로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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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곳저곳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불행이나 불쾌감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나와 같은 경우에 놓인 사람이라면 모두 이 불행과 불쾌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이 불쾌감 때문에 나를 과오 또는 죄악에서 생겨난 사람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기에, 이 불쾌감과 불행의 원인을 사회의 죄악자로 인정해 이것들을 없애는 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저 나를 위해서 없애려 노력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하를 위해, 천자님을 위해, 사회 일반을 위해 없애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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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세. 우리는 어떡하든 말이 되고 싶어하지만, 소는 웬만해선 될 수 없네. 나같이 늙고 교활한 사람이라도, 소와 말이 교미하여 잉태한 아이 정도일 걸세.
서둘러서는 안되네. 머리를 너무 써서는 안되네. 참을성이 있어야 하네. 세상은 참을성 앞에 머리를 숙인다는 것을 알고 있나? 불꽃은 순간의 기억밖에 주지 않네. 힘차게, 죽을 때까지 밀고 가는 걸세. 그것뿐일세. 결코 상대를 만들어 밀면 안 되네. 상대는 계속해서 나타나게 마련일세. 그리고 우리를 고민하게 한다네. 소는 초연하게 밀고 가네. 무엇을 미느냐고 묻는다면 말해주지. 인간을 미는 것일세. 문사를 미는 것이 아닐세.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


『문장』 3권 4호, 1941


정성일 인터뷰



http://blog.aladin.co.kr/tbox/4123545

http://blog.aladin.co.kr/tbox/4156225

(인터뷰 원문) 







1.

'이미' 모든 예술 중에 영화가 세상과 가장 가까이 있어요. 그래서 잘못하면 이 세상과 영화는 서로 뒤섞이거나 위치가 혼동될 위험을 갖고 있죠. 그와 반대되는 게 음악이 아닌가 싶어요. 루카치는 말년에 음악에 대해 몰두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리는 데는 실패했죠. 그만큼 멀리 있어요. 말하자면 현실과 예술의 거리에는 수많은 스펙트럼이 있고, 영화는 가장 가까이에, 음악은 가장 멀리에 있는 것 같아요.

다시 영화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찍어도 그 세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영화 속에 세상의 흔적이 잠입하고, 그것이 영화에 어떤 동력을 제공하고, 움직이고 활동하게 만들죠. 이런 특성은 세상이 영화에 미치는 힘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영화가 세상을 흡수하는 능력이기도 해요. 그때 중요한 것은 만드는 자의 의지예요. 현실의 어떤 점을 흡수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때로는 현실에 직접적으로 굴복하기도 하고, 반대로 지나치게 심미적으로 흘러가 버리기도 해요. 둘 다 아닙니다. 틀린 방법이에요.

중요한 것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선한 의지' 예요.

자, 이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죠.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부터는 악인가. 이쯤되면 철학의 지점에 다다라요. 따라서 저는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윤리-미학-정치라고 생각해요. 이 요소들 중에 하나만 무너져도 성립할 수 없어요. 이 윤리-미학-정치가 영화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흔히 돈이냐 예술이냐라는 식으로 질문하는데, 그건 틀린 질문이에요. 너무 많은 것들을 단순화하죠. 틀린 질문이 틀린 답을 유도하고, 그런 식으로는 절대 어떤 결론에 다다르지 못해요. 예술이냐 아니냐, 이런 식으로 질문의 가능성을 좁혀버려서는 안돼요.




2.

결국... 영화에서 봐야 하는 건 영화죠. 무슨 말이냐면, 사람들은 보통 영화에서 줄거리나 배우를 본다는 거예요. 비평에서도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제가 동료들의 비평에서 가장 실망하는 경우는 비평이 영화와 TV를 구별하지 못할 때예요. 그럼 영화에서 영화를 본다란 뭘까. 쇼트를 보는 겁니다. 쇼트의 활동 범위. 활동력. 목적. 미학적 개념. 씬 속에서의 위치. 그리고 그 위치들의 상호 조직과 관계. 즉, 영화 안에서 쇼트라는 세포가 생명을 얻는 과정. 그 쇼트의 질료적 기반은 절대적으로 테크놀러지 그 자체입니다.

음악을 예로 들면... 음악을 그냥 많이 듣는다고 해서 음악을 더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예요. 한계가 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씨디 장수와 그에 비례한 지식만 늘어납니다. 누가 작곡하고 누가 연주하고...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아무리 들어도 뭔가 제자리를 도는 것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죠. 그러다 음악을 좋아하는 어떤 분과 그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한참 얘기하다가 그 분이 조심스럽게 물으시는 거예요.

'그런데 혹시, 악보를 못 읽으시는 건 아니죠?'

그때 진짜 철렁했어요. 허를 찔린 기분이었죠. 지금은 아주 잘은 아니지만 악보를 읽을 수는 있어요. 그러니까 음악이 더 이해가 되고, 더 많은 걸 느끼게 됐어요. 음악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변화가 이해의 폭을 넓힌 거죠.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아무 생각없이 보는 영화에서 얻는 건 목록들, 그러니까 감독 이름, 배우 이름, 제목 뿐이에요. 어느 순간부터는 양적으로만 팽창할 뿐이죠. 많이 본다는 것, 양적 팽창이 질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moment, 그것이 질료적 기반에서 시작됩니다.




3.

저는 읽는 이를 설득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게 글이란 내 자신의 생각이 진전되는 과정을 따라가는 기록일 뿐이에요. 영화를 통해 어떤 사고를 갈데까지 가도록 하는거죠. 제 글은 '내 질문에 내가 답을 하는 과정'입니다. 나와 영화가 대면하는 게 아니예요. 영화를 본 나와 글을 쓰는 내가 대면하는 거죠.

종종 저는 문장 대신에 단어들을 나열할 때가 있어요. 글을 쓰다 보면 어떤 생각이 나고 그걸 쫓아가느라 그래요. 그런데 글을 다듬으려는 과정에서 그 생각 혹은 느낌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어요. 제겐 처음에 떠올랐던 생각을 붙잡는 게 더 중요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질문만 있는 경우도 있어요.

(잠시 침묵) 질문은 종결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순간 영화가 끝나요.

(잠시 침묵) 내 두뇌 안에서 어떤 영화를 종결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끝내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영화가 제게는 가장 위대한 영화예요.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게 하고, 더 나아가게 하는 영화입니다. 제가 관심있는 건 그 나아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