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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3 :: 어둡고 깊은 눈
2010.10.05 :: 정성일 인터뷰

나는 생명 있는 자를 발견할 때 권력에의 의지도 발견했다. 그리고 봉사하는 자의 의지에서도 나는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했다.

약자가 강자를 섬기도록, 생명 있는 자는 보다 약한 자의 주인이 되려는 자기의 의지를 설득한다. 약자도 이 기쁨만은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보다 작은 자는 가장 작은 자에 대한 기쁨과 권력을 갖기 위해 보다 큰 자에게 헌신하는 것처럼 가장 큰 자도 권력을 위해 헌신하고 — 생명을 건다.

모험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을 걸고 주사위놀이를 하는 것, 그것도 가장 큰 자의 헌신이다.

그리고 희생, 봉사, 사랑의 눈길이 있는 곳에는 주인이 되려는 의지도 있다. 이때 보다 약한 자는 샛길로 보다 권력 있는 자의 성과로 몰래 숨어들어가 — 거기서 권력을 훔쳐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비밀을 삶 자체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보라”하고 삶은 말했다.

“나는 항상 자기 자신을 초극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대들은 이것을 생산에의 의지, 또는 목표, 보다 높은 것, 보다 멀리 있는 것, 보다 다양한 것에의 충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한 가지 일이며 동일한 비밀이다.

나는 이 한 가지 일을 단념하기 보다는 오히려 몰락할 것이다. 그리고 정녕 몰락이 일어나고 낙엽이 질 때, 보라, 삶은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권력을 위해서!

내가 투쟁, 생성, 목적 그리고 여러 목적 사이의 모순이 되어야 한다는 것, 아, 나의 이런 의지를 간파하는 자는 내 의지가 얼마나 구부러진 길을 가야 하는가도 간파하리라!

내가 무엇을 창조하든, 그리고 내가 그것을 얼마나 사랑하든 — 나는 곧 내가 창조한 것과 내 사랑의 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내 의지가 그렇게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하는 자여, 그대도 나의 의지의 오솔길이며 발자국이다. 정녕 나의 권력에의 의지는 그대의 진리에의 의지조차도 발로 삼고 걸어간다.

진리를 향해 생존에의 의지라는 말을 쏜 자는 물론 진리를 적중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의지는 —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욕구할 수 없고, 한편 이미 현존하는 것은 새삼스레 생존을 욕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삶이 있는 곳, 거기에 의지도 있다. 그러나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 권력에의 의지다!”

일찍이 나에게 삶은 이렇게 가르쳤다. 그리고 나는 이 가르침을 바탕으로, 그대들 최고의 현인들이여, 그대들에게 그대들의 마음속에 있는 수수께끼를 풀어주리라.

정녕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무상하지 않은 선과 악 —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은 언제나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다시금 초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들 평가하는 자들이여, 선과 악에 대한 그대들의 평가와 말로써 그대들은 폭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들의 숨겨진 사랑이며 그대들의 영혼의 광휘, 전율, 범람이다.

그러나 그대들의 가치로부터 보다 강한 폭력, 새로운 초극이 자라난다. 이것에 의해서 알과 알 껍질이 부서진다.

그리고 선과 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자는 정녕 우선 파괴자가 되어 여러 가치를 부숴버려야 한다. 이렇게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해 있다. 그러나 최고의 선은 창조적인 선이다.

그대들 최고의 현인들이여, 비록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오직 이에 대해서만 말하자. 침묵은 더 나쁘다. 감추어진 모든 진리는 독을 갖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진리에 의해 부서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부숴버리자! 아직도 지어야 할 집이 허다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둡고 깊은 눈

 

김정욱전, 갤러리 스케이프, 2013·1·18

"인간의 얼굴에서 눈은 감정을 드러내는, 감출 수 없는 치명적 부위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보이는 눈, 그래서 너무 많은 시간과 그 시간의 양만큼 눌린 기억과 상처를 간직한 눈을 본다는 것은 좀 슬픈 일이다. 얼굴이 아니라 눈이 결국 내면이랄까, 마음과 정신, 굴곡 심한 사연과 주름 잡힌 상처의 결들을 찰나적으로 보여주다 멈춰있다. 보는 이들은 그 눈에서 눈을 뗄 수 없다. 강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보는 이를 마냥 빨아들일 것도 같다. 그것은 깊고 신비하고 공포스러운 구멍이다. 자궁 같은 눈, 텅 빈 구멍 같은 눈이다. 바라보는 자는 시선이고, 바라보여지는 자는 눈이다. 이 그림 앞에서 나는 부득불 눈이 된다. 하나의 대상으로 자꾸 얼어붙는다. 그러나 나를 그윽하게 굽어보는 저 눈, 하늘에 떠있는 별이 있어 고독하지 않다. 머리에 떠 있는 별을 보아야 하는 시간이다. 겨울의 깊고 추운 밤이 무척이나 긴 나날이다."

 

원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112121085&code=990100






달관한 사람에게는 괴이한 것이 없으나, 속인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으면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달관한 사람이라 해서 사물들을 일일이 찾아 눈으로 직접 보았겠는가.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눈앞에 그려 보고, 열가지를 보면 백가지를 마음속으로 상상해 보았을 뿐이다. 천만 가지 괴기한 현상이란 도리어 사물에 잠시 붙은 것이고, 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한가롭게 여유가 있으며, 사물에 응수함이 무궁무진하다.

반면 본 것이 적은 자는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가 검다고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두루미가 다리가 길다고 위태롭게 여긴다. 그 사물 자체는 본디 괴이할 것이 없는데 저 혼자 화를 내고, 한 가지 일이라도 제 생각과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조리 모함하려 든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색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石綠색을 발하기도 한다. 해가 비치면 자주색이 튀어 올라, 눈에 어른거리다가 비취색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그 색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도 않고서 먼저 마음속으로 정해 버린 것이다.

아! 까마귀를 검은색에 가두어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다시 까마귀를 기준으로 이 세상의 모든 색을 가두어 두려는 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앞서 말한 푸른색과 붉은색이 까마귀의 검은색 중에 들어 있는 빛인 줄 누가 또 알겠는가. 검은색을 일러 ‘어둡다’고 하는 것은 비단 까마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색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은 검기 때문에 사물을 비출 수가 있고, 옻칠도 검기 때문에 거울처럼 비추어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색이 있는 것 치고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형체가 있는 것치고 맵시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미인을 살펴보면 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고개를 나직이 숙이고 있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턱을 고이고 있는 것은 한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것은 시름에 잠겨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무언가 기다리는 것이 있으면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이고,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만약 또 그녀에게 재계齋戒하듯이 단정히 서 있지 않는다거나, 소상塑像처럼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지 않는다고 나무란다면, 이는 양 귀비楊貴妃더러 치통을 앓는다고 꾸짖거나 번희樊嬉더러 쪽을 감싸 쥐지 말라고 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사뿐대는 걸음걸이(蓮步)를 요염하다고 조롱하거나, 손바닥춤(掌舞)을 경쾌하다고 꾸짖는 격이다.

나의 조카 종선宗善은 자가 계지繼之인데, 시를 잘 지었다. 한 가지 법에 얽매이지 않고 온갖 형식을 두루 갖추어, 우뚝이 우리나라의 대가가 되었다. 성당盛唐의 시풍인가 하면, 어느새 한나라, 위나라 때의 시풍이 되고, 또 어느새 송나라, 명나라 때의 시풍이 된다. 그래서 ‘송나라, 명나라 때의 시풍이로군’하고 말하기가 무섭게, 다시 성당의 시풍을 띠고 있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두루미를 위태롭게 여기는 것이 너무도 심하건만, 계지의 정원에 있는 까마귀는 홀연 푸르렀다 홀연 붉었다 한다. 세상 사람들은 미인을 재계하듯이 서 있거나 소상처럼 앉아있게 만들려고 하지만, 손바닥 춤이나 사뿐대는 걸음걸이는 날이 갈수록 경쾌하고 요염해진다. 쪽을 감싸 쥐거나 치통을 앓는 모습도 각기 맵시를 갖추고 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에는 달관한 사람은 적고 속인들만 많으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



연암노인
燕巖老人이 연상각烟湘閣에서 쓰다.

(菱洋詩集序)





세상이 무섭다는 걸 깨달은 사람은 매사에 조심하지. 조심성은 대개 인격을 떨어뜨리게 되네. 세상의 다른 조심스런 사람을 보게. 세상을 뚫고 나가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세. 친구로 삼겠는가? 큰일을 맡기겠는가? 이해관계 이상의 무엇을 바라겠는가?
세상을 무서워해선 안 되네. 태어난 세상이 무서워서야 살아있는 것 자체가 괴로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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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곳저곳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불행이나 불쾌감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나와 같은 경우에 놓인 사람이라면 모두 이 불행과 불쾌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이 불쾌감 때문에 나를 과오 또는 죄악에서 생겨난 사람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기에, 이 불쾌감과 불행의 원인을 사회의 죄악자로 인정해 이것들을 없애는 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저 나를 위해서 없애려 노력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하를 위해, 천자님을 위해, 사회 일반을 위해 없애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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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세. 우리는 어떡하든 말이 되고 싶어하지만, 소는 웬만해선 될 수 없네. 나같이 늙고 교활한 사람이라도, 소와 말이 교미하여 잉태한 아이 정도일 걸세.
서둘러서는 안되네. 머리를 너무 써서는 안되네. 참을성이 있어야 하네. 세상은 참을성 앞에 머리를 숙인다는 것을 알고 있나? 불꽃은 순간의 기억밖에 주지 않네. 힘차게, 죽을 때까지 밀고 가는 걸세. 그것뿐일세. 결코 상대를 만들어 밀면 안 되네. 상대는 계속해서 나타나게 마련일세. 그리고 우리를 고민하게 한다네. 소는 초연하게 밀고 가네. 무엇을 미느냐고 묻는다면 말해주지. 인간을 미는 것일세. 문사를 미는 것이 아닐세.







정성일 인터뷰



http://blog.aladin.co.kr/tbox/4123545

http://blog.aladin.co.kr/tbox/4156225

(인터뷰 원문) 







1.

'이미' 모든 예술 중에 영화가 세상과 가장 가까이 있어요. 그래서 잘못하면 이 세상과 영화는 서로 뒤섞이거나 위치가 혼동될 위험을 갖고 있죠. 그와 반대되는 게 음악이 아닌가 싶어요. 루카치는 말년에 음악에 대해 몰두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리는 데는 실패했죠. 그만큼 멀리 있어요. 말하자면 현실과 예술의 거리에는 수많은 스펙트럼이 있고, 영화는 가장 가까이에, 음악은 가장 멀리에 있는 것 같아요.

다시 영화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찍어도 그 세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영화 속에 세상의 흔적이 잠입하고, 그것이 영화에 어떤 동력을 제공하고, 움직이고 활동하게 만들죠. 이런 특성은 세상이 영화에 미치는 힘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영화가 세상을 흡수하는 능력이기도 해요. 그때 중요한 것은 만드는 자의 의지예요. 현실의 어떤 점을 흡수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때로는 현실에 직접적으로 굴복하기도 하고, 반대로 지나치게 심미적으로 흘러가 버리기도 해요. 둘 다 아닙니다. 틀린 방법이에요.

중요한 것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선한 의지' 예요.

자, 이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죠.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부터는 악인가. 이쯤되면 철학의 지점에 다다라요. 따라서 저는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윤리-미학-정치라고 생각해요. 이 요소들 중에 하나만 무너져도 성립할 수 없어요. 이 윤리-미학-정치가 영화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흔히 돈이냐 예술이냐라는 식으로 질문하는데, 그건 틀린 질문이에요. 너무 많은 것들을 단순화하죠. 틀린 질문이 틀린 답을 유도하고, 그런 식으로는 절대 어떤 결론에 다다르지 못해요. 예술이냐 아니냐, 이런 식으로 질문의 가능성을 좁혀버려서는 안돼요.




2.

결국... 영화에서 봐야 하는 건 영화죠. 무슨 말이냐면, 사람들은 보통 영화에서 줄거리나 배우를 본다는 거예요. 비평에서도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제가 동료들의 비평에서 가장 실망하는 경우는 비평이 영화와 TV를 구별하지 못할 때예요. 그럼 영화에서 영화를 본다란 뭘까. 쇼트를 보는 겁니다. 쇼트의 활동 범위. 활동력. 목적. 미학적 개념. 씬 속에서의 위치. 그리고 그 위치들의 상호 조직과 관계. 즉, 영화 안에서 쇼트라는 세포가 생명을 얻는 과정. 그 쇼트의 질료적 기반은 절대적으로 테크놀러지 그 자체입니다.

음악을 예로 들면... 음악을 그냥 많이 듣는다고 해서 음악을 더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예요. 한계가 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씨디 장수와 그에 비례한 지식만 늘어납니다. 누가 작곡하고 누가 연주하고...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아무리 들어도 뭔가 제자리를 도는 것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죠. 그러다 음악을 좋아하는 어떤 분과 그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한참 얘기하다가 그 분이 조심스럽게 물으시는 거예요.

'그런데 혹시, 악보를 못 읽으시는 건 아니죠?'

그때 진짜 철렁했어요. 허를 찔린 기분이었죠. 지금은 아주 잘은 아니지만 악보를 읽을 수는 있어요. 그러니까 음악이 더 이해가 되고, 더 많은 걸 느끼게 됐어요. 음악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변화가 이해의 폭을 넓힌 거죠.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아무 생각없이 보는 영화에서 얻는 건 목록들, 그러니까 감독 이름, 배우 이름, 제목 뿐이에요. 어느 순간부터는 양적으로만 팽창할 뿐이죠. 많이 본다는 것, 양적 팽창이 질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moment, 그것이 질료적 기반에서 시작됩니다.




3.

저는 읽는 이를 설득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게 글이란 내 자신의 생각이 진전되는 과정을 따라가는 기록일 뿐이에요. 영화를 통해 어떤 사고를 갈데까지 가도록 하는거죠. 제 글은 '내 질문에 내가 답을 하는 과정'입니다. 나와 영화가 대면하는 게 아니예요. 영화를 본 나와 글을 쓰는 내가 대면하는 거죠.

종종 저는 문장 대신에 단어들을 나열할 때가 있어요. 글을 쓰다 보면 어떤 생각이 나고 그걸 쫓아가느라 그래요. 그런데 글을 다듬으려는 과정에서 그 생각 혹은 느낌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어요. 제겐 처음에 떠올랐던 생각을 붙잡는 게 더 중요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질문만 있는 경우도 있어요.

(잠시 침묵) 질문은 종결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순간 영화가 끝나요.

(잠시 침묵) 내 두뇌 안에서 어떤 영화를 종결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끝내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영화가 제게는 가장 위대한 영화예요.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게 하고, 더 나아가게 하는 영화입니다. 제가 관심있는 건 그 나아감이에요.